2008년 06월 13일
우유와 머그잔에 관한 짧은 담론 - 01화 -
유백색으로 빛나는 머그잔은 그의 검지와 엄지에 가해지는 힘에 몸을 맏긴채 안정적으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왠지 온기를 머금은 듯한 흰색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한없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실제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던 잔에서는 조금씩 김이 올라오는 듯 하더니 마침내 확연히 따뜻해졌음을 느낄정도로 강하게 모락모락 김을 뿜어댔다. 머그잔 안에는 따뜻하게 뎁혀진 우유가 있었고 잔을 들여다보던 그는 만족스러운듯 잔 반대편을 감싸쥐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상대편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받거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소년은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창백하지만 온화해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초점없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눈앞을 더듬기 시작했다. 방안 한 구석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지만 소년에게는 그 빛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의 미간에 미세하게 주름이 잡혔다. 짧은 한숨을 쉰 그는 장갑을 벗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소년의 손을 잡고 천천히 컵의 손잡이를 소년의 손에 들려주었다. 머그잔에 손이 닿은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소년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짧게 대꾸하고는 묵묵히 소년이 우유를 마시려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난번과는 달리 손잡이를 잡는 방법을 터득한 것만 같았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잔의 표면을 감싸쥐려는 모습은 지난번에 그가 겪었던 시행착오에 대한 불안감을 일시에 해소시켜 주었으며 그에게서 긴장감을 빼앗아갔다. 그때였다.
'앗!'
짧은 비명과 함께 무언가에 데인듯이 소년은 잔에서부터 손을 떼었고, 으례히 땅에 떨어지리라 생각했던 머그잔은 다행스럽게도 그의 손에 바닥이 받쳐진채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한번 자신의 실책에 혀를 차며 잔을 땅에 내려놓았다.
"미안하구나, 조금 식은 다음에 먹는게 좋겠다."
소년은 아직도 손바닥이 얼얼한지 계속해서 손을 문지르고 입으로 바람을 불며 손을 식히려 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각각 하나씩 양손에 있던 장갑을 벗고, 손을 비비고 있던 소년의 손을 조심스래 감싸쥐며 말했다.
"손을 비비면 더 뜨거워지기 때문에 데인 곳에는 좋지 않단다. 잠시 가만히 있거라."
소년은 볼에 홍조를 띄고는 조용히 그가 자신의 손을 식혀주는 것을 느꼈다. 비록 몸에 닿은 곳은 차가웠지만 소년은 생전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온기를 느꼈다.
"손이 항상 차가우세요. 어디 아프신건 아니신지요."
그는 이 질문이 벌써 4번째임을 상기하였지만 언제나처럼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오래전부터 이랬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이상도 없다. 매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소년은 언제나처럼 안도한 표정을 짓고는 잠시 후 조심스래 두 손을 그에게서 빼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시 잔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다시 장갑을 낀 손으로 바닥에 놓여있던 잔을 집어들고는 다시 소년에게 손잡이를 내밀었다. 그가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우유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소년의 얼굴은 어쩐지, 어쩐지 알 수 없는 따스함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그에게 아직도 살아있는 심장이 뛰고 있다는 착각을 느끼며 그는 조용히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유난히 밝은 달빛덕에 그가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의 범위가 그조차 놀랄 정도로 넓어져 있던 날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들어찬듯이 그의 귓속을 조근조근 간지럽혔으며, 눈을 감아도 그의 앞에 펼쳐진 수많은 사람들의 오오라가 마치 생전에 새겨진 망막의 태양빛처럼 강렬하게 비추었다.
언제나처럼 유유히 하늘을 날던 그에게 서늘한 공기가 볼을 스치고 지나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줄 알았던 바람은 이내 다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마치 영원처럼 그의 곁을 머물며 부드럽게 그를 감싸안아주었다. 하지만 불행이도 그의 피부는 더이상 그에게 바람의 상쾌함을 느낄 그 어느 감각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생전에는 그렇게나 염원하던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행위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였다. 영원이란 시간은 그에게 호기심과 신비를 빼앗아갔으며 그저 조금이라도 더 그 영원을 쟁취하고 싶은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욕망만이 그를 이루는 전부였다. 그는 공허했다. 어느정도의 힘을 갖게 되자 그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욕심마저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최초의 자극과는 다르게 지루하고 맹목적인 삶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그가 응당 가져야 한다고 믿었던 영원에 집착하였다.
그날은 그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 되었다. 지나칠정도로 향상된 감각 덕분에 그는 아주 미약하지만 그를 자극하는 한 향기를 포착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향은 정말로 특이했다. 은근하기 때문에 딱히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쉽게 사라지거나 잊혀지지 않았으며 곧 끊어질 듯 하면서도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어느 향보다 청명했으며 한점의 티도 없이 정결하였다. 그는 곧 도취될 듯한 감각을 느끼며 언덕위에 서있는 허름한 집 앞에 내려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발견했다.
그가 처음 본 소년의 모습은 이미 거의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지친듯이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 누워있던 소년은 곧이어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눈치챈듯 체념한채로 그저 짧은 신음만을 간헐적으로 내뱉으며 마른 눈물자국으로 뒤덮인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쥐었다. 하지만 체념은 슬픔마저 앗아가진 못하였다. 소년의 손이 가리고 있던 마른 눈물자국 위로 새로운 눈물이 흐르고 지나갔다. 곧이어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 소년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듯, 생전에 할 수 있는 마지막 감정표현을 있는 힘을 다해 쏟아내었다.
그는 소년이 처한 상황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입고 있는 허름한 옷가지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그리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아닐 것이다. 이런 곳에서 혼자서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최근 근처 마을을 잠식하기 시작한 전염병이 그 원인일 것이고 그의 죽음을 보살펴 줄 이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가난한 농가의 자식임을 그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가 가진 포식자의 특성상 다양한 종류의 인간을 만나볼 수 있었으며 수많은 신념의 붕괴와 쾌락의 탐닉을 지켜보았다. 가장 정숙한 부인조차 약간의 노력만 기울이면 그에게 은밀한 추파를 던져 왔으며, 굳은 신념으로 무장한 종교인조차 그가 내건 조그마한 유혹에 그 짧은 생에 걸쳐 이룬것을 전부 내던져 버렸다. 유한한 인생을 갖고 있는 인간은 그 짧고 무가치한 삶을 손쉽게 소모하기를 바란다고 그는 굳게 믿었으며 그가 이빨을 드러내고 아무런 가책없이 생명을 삼킬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의식적인 면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마주했던 인간의 죽음이란 탁하고 고약한 향을 풍기는 추잡한 삶의 찌꺼기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한 죽음을 눈앞에 둔 소년이 어찌 이리도 강렬한 생명의 향을 품고 있는지, 여태까지 오랫동안 보아온 죽음중에 가장 초라해보이는 죽음이 어찌도 그를 이렇게 강렬하게 유혹하고 있는지 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시시각각 소년의 생명은 사그라들고 있었고 그에게 빠른 결단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어둠은 한때 그에게 너무나도 강렬한 유혹으로 타락을 종용했었다. 진하고 감미로운 유혹에 빠져드는 순간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그는 다시 빛을 볼 권리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빛속에 있을때는 그 아늑함이 얼마나 지겨웠던가. 항상 따사롭게 그를 둘러쌌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게 느껴졌는가.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모든것을 허락하는 듯 하면서 후회, 회환, 증오, 자괴감등만을 남겨주었다. 짧은 결단이 가져온 기나긴 파멸의 시작이었다.
그랬다. 한번 발을 들여놓은 어둠은 다시는 그를 놔주질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아주 간단하게 소년을 어둠의 피조물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그 기나긴 평생에 걸쳐 경험하지 못했고 가장 알고 싶어하는 해답은 영영 잃어버리게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다시금 이러한 해답을 구하려면 정말 지옥같은 긴 시간을 오직 후회속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그는 공포심마저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빛나던 소년도 그저 어둠속에 동화되어 나와 같아질 것 뿐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소년을 어둠에 동화시킬 용기가 들질 않았다.
그의 앞에 놓인 시간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길었다. 아마도 그는 그 시간을 절대로 감당하지 못할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자멸해버린 수많은 동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이성을 유지하면서 살기에는 몸뚱이들에 깃든 생전의 사고방식이 지나치게 방해가 되었다. 아마 그도 조만간에 목적과 이성을 상실하고 광기에 물들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년은 빛이었다. 미약하나마 더없이 청정한 빛을 내뿜고 있는 맑은 빛이었다. 그의 강대하기 이를데 없는 마력은 깊고 깊은 어둠이었기에 슬프게도 속수무책으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봉인되어 있던 금주(禁呪)를 떠올렸다.
빛에서의 금기가 어둠이라면 반대로 어둠속에서의 금기는 빛이다. 자기희생이라는 가장 강한 이타적 행위는 어둠에 속한 자들로 하여금 신의 권능을 흉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망설여졌다. 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하려나? 아니다.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올지도 모르지만 그때 내가 지금처럼 이성을 붙잡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차라리 기회를 붙잡고 있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는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는 소년의 숨소리를 들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몇백년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고독한채로 마력에 집착했다. 그의 권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진한 쾌락처럼 만족감이 들었다. 수없이 강한 영혼들의 피에 집착하면서 축척해온 마력이었다. 아이러니였다. 그가 해답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모아온 이 강대한 마력이 이런식으로 도움을 줄 줄이야. 그는 소년의 손을 움켜쥐었다. 신기했다. 소년의 미약한 맥박과는 반대로 그의 영혼의 파동은 그가 보아온 그 어느것보다 더 강렬하게 요동쳤다. 그가 가졌던 미약한 불안감이 눈녹듯 사라졌다. 그는 마침내 해답을 얻으리라. 그는 눈앞에서 강렬하게 내뿜어지는 빛을 보았다.
# by | 2008/06/13 02:17 | 자작단편 | 트랙백 | 덧글(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